01
So call me anything
황인찬, 종로사가

앞으로는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다정하게 말했지 하지만 나는 네 마음을 안다 걷다가 걷다가 걷고 또 걷다가 우리가 걷고 지쳐 버리면, 지쳐서 주저앉으면, 주저앉은 채 담배에 불을 붙이면,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보았다고 믿어 버리고, 믿는 김에 신앙을 갖게 되고, 우리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깊은 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겠지 우리는 이 거리를 끝없이 헤매게 될 거야 저것을 빛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너는 말할 거고 그러면 나는 그것을 빛이라 부르고 사람이라 믿으며 그것들을 하염없이 부르고 이 거리에 오직 두 사람만 있다는 것, 영원한 행인인 두 사람이 오래된 거리를 걷는다는 것, 오래된 소설 같고 흔한 영화 같은, 우리는 그러한 낡은 것에 마음을 기대며, 우리 자신에게 위안을 얻으며,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겠지 너는 손을 내밀고 있다 그것은 잡아 달라는 뜻인 것 같다 손이 있으니 손을 잡고 어깨가 있으니 그것을 끌어안고 너는 나의 뺨을 만지다 나의 뺨에 흐르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겠지 이 거리는 추워 추워서 자꾸 입에서 흰 김이 나와 우리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 느끼게 될 것이고, 그 느낌을 한없이 소중한 것으로 간직할 것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런 것이 우리의 소박한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 것이고,

우리는 추위와 빈곤에 맞서는 숭고한 순례자가 되어 사랑을 할 거야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야 그것이 너무나 환상적이고 놀라워서, 위대하고 장엄하여서 우리는 우리가 이걸 정말 원했다고 믿겠지 그리고는 신적인 예감과 황홀함을 느끼며 그것을 견디며 끝없이 끝도 없이 이 거리를 걷다가 걷도 또 걷다가 그러다 우리가 잠시 지쳐 주저앉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에 담긴 것을 보고, 거기에 담긴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알아 버리겠지 그래도 우리는 걸을 거야 추운 겨울 서울의 밤거리를 자꾸만 걸을 거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서 그냥 막 걸을 거야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아직도 나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나는 너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이것이 얼마나 오래 계속된 일인지 우리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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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당신에게

아침에 장대비 내리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누가 창문에다 도토리 수천 알을 쏟아붓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들렸거든요.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습니다. 우려했던 것처럼 난 이파리가 거센 빗줄기에 맞아 휘청대고 있었지요. 마룻바닥에 난을 내려놓으니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닦아내며,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고맙다는 인사 같은 건 없지요. 그냥 나 혼자 저를 어여삐 여기며 꿈결인가, 하며 바라보았어요.

장마예요. 길고 지루한.

어릴 땐 습하고 눅눅한 기운 때문에 장마가 싫었는데 요새는 퍽 좋아합니다. 장마 때 혼자 집에 가만히 앉아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왠지 은둔자가 된 것같이 느껴지거든요.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비로소 숨을 만한 곳을 겨우 찾은 은둔자의 긴장 섞인 안도감, 이어 느껴지는 조금의 지루함과 피로.
이런 기분 재미있잖아요?

새우처럼 등을 말고 누워 당신을 생각합니다. 사실, 편지를 시작하기가 힘들었어요. 예전의 당신과 내 모습을 회상해보다 왠지 치아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기도 했어요. 꼬박 보름을 망설이다 이렇게 펜을 들었네요.

아마도 어리석고 철없던 내 모습을 떠올리는 일이 그리 기분 좋지만은 않은 까닭이겠지요. 그때 나는 어렸고, 오래 죽어 있었고, 가끔 살아나면 소란스러웠지요. 당신은 나를 오래 보았죠. 물 밖에 내놓은 물고기처럼 파닥이며 요동치던 나를 알아봤지요. 하필.

하필이라고 말을 하고 보니 참 좋네요. 어찌할 수 없음, 속절없음이 사랑의 속성일 테니까. 사랑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싶네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할게요.

바보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요. 850년 전 개암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다 개암 한 알이 이마에 톡 떨어져 그만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때 알았다고요. 먼 먼 훗날, 내가 당신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오래 어두워질 거라는 사실을요. 실제로 당신을 만나고 퍽 좋았던 나는 어찌할 도리 없어, 흙 속에 두 손을 깊이 넣었던 것 같아요. 열 개의 손톱에 흙이 촘촘히 박히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흙냄새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고요. 흙은 손을 부드럽게 덮어주었고 그게 내 사랑의 뿌리가 되었지요. 나는 주저앉은 채로 자랐고, 기어코 초록이 되었고, 꽃도 피웠지요.
그래요. 나는 사랑이 자신의 몸을 통째로 써서 나무를 심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토록 오랫동안 당신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도 나무의 견고한 부동성 때문이겠지요.
그건 ‘깊은 일’이었던 것 같아요. 제대로 설명할 순 없지만요.

헤어지고 나서 혼자 방 안을 둘러보며 당신이 앉았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더듬어보았지요. 내 손, 잘린 사랑의 뿌리로 자리를 더듬어보며 바랐던 것 같아요. 당신이 내내 생생하기를. 그래서 어여쁘기를. 그 시절 혼자 괴로워하다 참기 힘들어지면, 이런 제 심경을 친구한테 메일로 전한 적도 있었는데요. 그때 메일을 보니 나는 이렇게 썼더군요.


그 사람이 너무 빨리 늙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만진 몸 구석구석이 너무 빨리 사그라지지 않고 내내 건강하기를 바라.
나와 별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내내 생생하게 나쁘기를 바라.
나는 그 사람 삶이 캄캄하고 축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아.
나는 지나치게 나이를 많이 먹지 못했다는 비밀을 하나 갖고 있지만, 사실은 굉장히 늙었단다.
사람들은 모르지, 내 백발을..

가끔 그 사람의 생각이 들려.
그리고 귀를 잊지.
사랑했었던 것 같아.
달리 할말은 없어.


가끔 당신 생각이 들려 귀를 잊으려 했지요. 나보다 훨씬 커진 내 귀를 고흐처럼 자를 수 없으니까 잊으려고, 잊기 위해 애썼던 거겠지요. 참, 속절없는 일인데 말이죠. 그러나 얼마나 다행이에요. 시간은 흐르고, 잊으려 애쓰지 않아도 귀는 작아지고 우리는 떨어져 있어 서로를 다시,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시간들이었고, 퍽 도움이 됐던 경험이었어요. 진심입니다.

기억해요? 당신이 생각보다 어두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자주 나뭇잎에 매달려 끈질기게 초록, 초록이 되려고 애썼던 일이요. 나는 다 기억해요. 당신이 내 앞에서 문고리처럼 도드라져졌던 것. 아주 딱딱하고 화난 것처럼. 나는 놀라서 당신을 비틀어 잡았고, 문이 열렸고, 그때부터 당신은 내 속으로 수없이 이양되었죠. 나중에는 열린 문을 어떻게 닫아야 할지 몰라 오래 방황했어요. 당신을 비우려고, 비우려고 애를 써도 잘 안됐던 것. 이양된 당신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 수도, 혹은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일 수도, 혹은 당신이 나를 멀리서 너무 꽉 붙들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맞아요. 난 이파리가 거센 비를 피하지 못해 휘청거렸듯이 나도 한 시절 당신에게 호되게 빠져 휘청거린 적 있었네요. 그때 나를 누군가 번쩍 들어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다면, 아마 그 사람을 증오했을 거예요. 누가 사랑에 빠진 자를 말릴 수 있겠어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나는 사람마다 각자 경험하고 지나가야 할 일정량의 고유 경험치가 존재한다고 믿거든요. 다 겪지 못하면 다음으로 못 넘어가는 거죠. 당신을 사랑하고, 또 헤어지던 순간은 꼭 필요한 경험이었어요. 그 일을 나는 긍정합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사람을 일컬어 “한밤중에 펼쳐진 책”이라고 했다는데, 나도 당신도 서로의 밤에 침입해 어느 페이지부터랄 것도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열렬히 서로를 읽어나간 거겠죠. 내게는 사랑에 대한 첫 독서가 당신이란 책이었고, 행복했고 열렬했어요. 어느 페이지는 다 외워버렸고, 어느 페이지는 찢어 없앴고, 어느 페이지는 슬퍼서 두 번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즐거웠습니다.

이제 나는 사랑이 흙 속 깊이 손을 파묻어 사랑의 뿌리로 삼고, 스스로 나무가 되어 피어나는 일이라고 믿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런 사랑은 평생에 딱 한 번뿐일 테니까요. 그보다 사랑은 연약한 뿌리, 공중에서 부유하는 뿌리를 서로 보듬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의 뿌리는 아주 약하고 흔들리고 움직이기도 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잘 포개지면 그 뿌리를 공중에서도 오래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고 믿을래요. 그게 더 진짜 같아요. 누가 사랑을 한 곳에 심을 수 있겠어요?

이 말을 쓰고 나서 혼자 활짝 웃습니다. 사랑은 한곳에 심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생각한 내가 마음에 듭니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 비가 멈추었네요. 장마가 지나고 나면 여름은 더 맹렬하게 푸른 독을 뿜어내겠죠? 다행이에요. 계절이 반복된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습니다. 여름이 가을에게 잡아먹히면 그다음은 차가운 미소를 짓는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안심이에요. 자꾸 잡아먹혀도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닐 거예요.
당신, 죽지 말아요. 생생하게 살아 나를 기쁘게 해주세요. 언제나 당신을 가슴 깊이에서 응원합니다. 항상 내 안부를 걱정해주는 당신, 내내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에 당도해 있는 연인.
안녕.

2013. 여름.

귀한 연꽃 향을 담아.

박연준 / 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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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돌, 사소함 그 바람 같은 무게

 

그것에서 그를 보게 한다
그리움에 있어서 가장 사무치는 것이 사소한 것이다
오후의 느긋한 데이트는 괜찮지만
목이 다 늘어날 만큼 즐겨 입던 티셔츠는
늦저녁 공원은 괜찮지만 맛있게 먹던 빵은
심야의 영화는 괜찮지만 색색 잠든 숨소리는
손톱, 그걸 매만지는 버릇, 퇴근 시간, 그 걸음걸이는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아
네가 좋아하던 사탕 봉지를 보고선
그 바람 같은 무게에 온몸을 다 얹은 때도 있었다
네 가방을 열면 사탕 냄새가 날 만큼 수북이 쌓이던
그것에서 너를 본 적이 있었다
사탕 봉지가 머리 위로 와르르
알맹이는 온데간데없고 그것들만 사방을 날아댔다
아주 미친 듯이 미친 듯이
사소한 게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사소함이 어디까지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향돌, 사소함 그 바람 같은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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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돌, 내 사랑의 속성 中

 

 

16일의 너와 17일의 너에게 각각의 생소한 사랑을 느껴. 단 하나의 너에게 나는 매번 새로운 사랑에 빠져. 이 사랑이 다하면 우리는 끝일까. 사랑보다 먼저 삶이 다하진 않겠지. 다 전하지도 못했는데 끝이 오진 않겠지. 그리되면 나는 꽃피우는 비가 되어 네가 내려지려나. 그 장마가 그치면 우리는 끝일까.

향돌, 내 사랑의 속성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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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그대에게 가고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별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 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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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어째서

 

잊고 있던 꽃무늬 원피스가 잡혔다.

어떻게 이런 걸 입고 다녔을까 의아해하다

의아한 옷들을 꺼내 입어보았다.

 

죽어버리겠다며 식칼을 찾아 들었는데

내 손에 주걱이 잡혀 있던 것처럼

그 주걱으로 밥을 퍼먹던 것처럼

 

밥 먹었냐, 엄마의 안부 전화를 끊고 나면

밥 말고 다른 얘기가 하고 싶어진다.

나는 이제 아무거나 잘 먹는다.

 

잊지 않으려고 포스트잇에 적었지만

검은콩, 면봉, 펑크린, 8일 3시 새절역, 33만 원 월세 입금,

포스트잇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었다.

 

까맣게 잊어버린 검은콩이 냉장고에 있었다. 

썩은 내를 풍기는 검은콩엔 왜 싹이 돋아 있는지.

 

이렇게 달콤한데, 중얼거리며

곰팡이 낀 잼을 식빵에 발라 먹던 엄마처럼

이렇게 멀쩡한데, 중얼거리며

유통기한 지난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던 엄마처럼

죽고 싶다는 말이 솟구칠 때마다

밥을 퍼서 입에 넣었다.

 

엄마도 나처럼 주걱을 잡았을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엄마는 매일 주걱부터 찾아야 했을 것이다.

 

밥맛은 어째서  잊힌 적이 없는지

꽃들의 모가지가 일제히

햇빛을 향해 비틀리고 있는지

경이로움은 어째서 징그러운지.

멈춰버린 시계를 또 차고 나왔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꽃 없는 꽃밭에 철퍼덕 앉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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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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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래 왔듯이

몇 개의 강과 몇 개의 구름으로는

나를 달랠 수가 없었어

한 계절 한 계절씩

다른 옷을 갈아입는 일로는

나를 바꿀 수 없었어

눈을 감으면 멀리서

작은 짐승이 혼자 눈을 밟고 가는 소리

보름달이 뜨면

길 잃은 늑대의 휘파람 소리

사람의 말을 배우지 않은 북쪽 숲의 바람 소리가

나를 불러서

새들의 하늘 지도를 빌려

열흘 낮 열흘 밤

이미 그곳에 있는 나에게로 갔어

나는 혼자일 때 가장 덜 외로웠으니

나는 사랑이라는 발음이 아주 서툴렀으니

광활한 얼음 벌판에서

풋사과 빛 오로라처럼 너울거리고 싶었어

별에서 슬픔이 날아와 내게 안길 때

무엇에서 시작되든 슬픔으로 끝나는 나의 시를

다시는 고치러 돌아가지 않기로 했어

내가 반성할 것이 라고는 슬픔뿐이고

그 슬픔마저 없으면 나는 정말 혼자가 될 테니까

그리고 기억이 나를 조금씩 속여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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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나날들

나날들이 나달나달해졌다

끝까지 사람으로 남아 있자는 말을 들었다

축생도에 속한 존재들은

오늘도 우글거리다 우리로 돌아갔다

그 자리에는 무수한 비늘들과 털들이 흩어져 있다

잘린 줄 모르고 여전히 날름거리는 혓바닥도 몇 있다

ㅡ이봐, 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고 있어.

ㅡ저는 매 순간 강해지고 있습니다.

ㅡ그 여자는 구제 불능이에요. 미쳤다고요.

ㅡ당신은 대체 그 말을 믿습니까?

ㅡ네가 죽든 내가 죽든 어디 끝까지 해보자구.

ㅡ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잖아요?

ㅡ그렇다고 내가 널용서한 건 아니야.

ㅡ아, 어지러워 죽겠어요.

달팽이관에서 흘러나온 돌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절망은 길가의 돌보다 사소해졌다

아직 사람으로 남아 있느냐고 누군가 물었다

축생도의 우기가 너무 길다

축축한 빨랫감들이 내뿜는 냄새를 견딜 수 없다

좀처럼 마르지 않는 나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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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호, 모든 익사체는 떠오르려고 한다 - 에밀 시오랑에게

이유 없는 슬픔이 나를 불심검문하는 날이 있네 그런 때 마음은 쪽방에 갇힌 어둠을 가만 들여다보네 물결무늬로 흔들리는 눈동자 위를 떠가는 부유물 같은 기억들, 한때 절망은 일벌처럼 분주히 인간의 정원을 쏘다녔지만 벌집이 된 심연의 여왕벌은 까만 애벌레만을 생산했네 권태의 명수 무기력의 천재 우울의 가내수공업자 타락의 장인 불신의 성자 따위가 이 돌연변이의 별명이었네 그것은, 나는 내가 되는 공포...... 홀로 될 때의 유령...... 갈 데 없는 귀소본능만이 시나브로 흐려가는 영혼의 녹슨 엔진이었네 그렇게

마음자리에 비탄의 괴뢰정권이 들어선 날이었네 나는 어둠 속을 심해어같이 헤엄치는 쪽방에서 마음눈의 색맹이 되어갔네 온몸이 물속에 잠겨야 사는 침수식물처럼, 모든 물은 익사의 빛깔을 띠고 있다는 자네의 말은 옳네 공중은 추락의 심도를 품고 모든 초록은 잿빛의 스승이지 이생의 제목은 전생의 죄목이었다는 농담을 알약처럼 삼키며 나는 내 그림자 속에 누워보네 그것은,  그림자의 그림자...... 거울 안의 겨울...... 단 한 번도 인생이 나의 소유권자인 적 없었다는 사실은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환희였네 이렇게

나는 당분간 인간으로 산다는 잘못을 끝까지 버티기로 마음잡았네 나를 매달고 무인지경의 황야를 날뛰던 불안이라는 야생말도 이 밤은 거친 숨을 고르고 있네 듣고 있는가, 불면의 언덕에 서서 날 거두지 못한 강물을 내려다보면 한 존재가 한 존재의 고통을 켜는 아름다운 꿈이 윤슬처럼 빛나며 들려오네 우리는 이미 삶은 몰라도 죽음은 누구보다 더 잘 연주하는 악기였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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