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스쳐갈 기억이 되어 떠오를 거야
김경미, 겹





저녁 무렵 때론

전생의 사랑이 묽게 떠오르고

지금의 내게 수련꽃 주소를 옮겨놓은 

누군가가 자꾸 울먹이고

내가 들어갈 때 나가는

당신의 뒷모습이 보이고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기다렸다 하고


2

위 페이지만 오려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

나뭇잎과 뱀그물, 뱀그물과 거미줄, 

거미줄과 눈동자, 혹은 구름과

모래들, 서로 무늬를 빚거나 기대듯

지독한 배신 밖에는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


3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 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겹, 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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