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겹
저녁 무렵 때론
전생의 사랑이 묽게 떠오르고
지금의 내게 수련꽃 주소를 옮겨놓은
누군가가 자꾸 울먹이고
내가 들어갈 때 나가는
당신의 뒷모습이 보이고
여름 내내 소식 없던 당신,
창 없는 내 방에서
날마다 기다렸다 하고
2
위 페이지만 오려내려 했는데
아래 페이지까지 함께 베이고
나뭇잎과 뱀그물, 뱀그물과 거미줄,
거미줄과 눈동자, 혹은 구름과
모래들, 서로 무늬를 빚거나 기대듯
지독한 배신 밖에는
사랑 지킬 방법이 없고
3
그러므로 당신을 버린 나와
나를 버린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청순하고 가련하고
늘 죽어 있는 세상을 흔드는
인기척에 놀라 저만치 달아나는
백일홍의 저녁과
아주 많이 다시 태어나도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
당신의 무릎이 또한 그러하고
겹, 김경미
'reco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현호, 모든 익사체는 떠오르려고 한다 - 에밀 시오랑에게 (0) | 2019.08.26 |
---|---|
이운진, 슬픈환생 (0) | 2019.07.03 |
강성은, 기일(忌日) (0) | 2019.04.20 |
허민, 끝나지 않은 (2) | 2016.10.27 |
이이체, 당신의 심장을 나에게 (0) | 2016.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