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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call me anything
이현호, 모든 익사체는 떠오르려고 한다 - 에밀 시오랑에게

이유 없는 슬픔이 나를 불심검문하는 날이 있네 그런 때 마음은 쪽방에 갇힌 어둠을 가만 들여다보네 물결무늬로 흔들리는 눈동자 위를 떠가는 부유물 같은 기억들, 한때 절망은 일벌처럼 분주히 인간의 정원을 쏘다녔지만 벌집이 된 심연의 여왕벌은 까만 애벌레만을 생산했네 권태의 명수 무기력의 천재 우울의 가내수공업자 타락의 장인 불신의 성자 따위가 이 돌연변이의 별명이었네 그것은, 나는 내가 되는 공포...... 홀로 될 때의 유령...... 갈 데 없는 귀소본능만이 시나브로 흐려가는 영혼의 녹슨 엔진이었네 그렇게

마음자리에 비탄의 괴뢰정권이 들어선 날이었네 나는 어둠 속을 심해어같이 헤엄치는 쪽방에서 마음눈의 색맹이 되어갔네 온몸이 물속에 잠겨야 사는 침수식물처럼, 모든 물은 익사의 빛깔을 띠고 있다는 자네의 말은 옳네 공중은 추락의 심도를 품고 모든 초록은 잿빛의 스승이지 이생의 제목은 전생의 죄목이었다는 농담을 알약처럼 삼키며 나는 내 그림자 속에 누워보네 그것은,  그림자의 그림자...... 거울 안의 겨울...... 단 한 번도 인생이 나의 소유권자인 적 없었다는 사실은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환희였네 이렇게

나는 당분간 인간으로 산다는 잘못을 끝까지 버티기로 마음잡았네 나를 매달고 무인지경의 황야를 날뛰던 불안이라는 야생말도 이 밤은 거친 숨을 고르고 있네 듣고 있는가, 불면의 언덕에 서서 날 거두지 못한 강물을 내려다보면 한 존재가 한 존재의 고통을 켜는 아름다운 꿈이 윤슬처럼 빛나며 들려오네 우리는 이미 삶은 몰라도 죽음은 누구보다 더 잘 연주하는 악기였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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