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은 마음을 잊었다는 뜻일까 외면한다는 뜻일까
스스로를 백치라 칭하며 이따금 열 개나 있는 손가락을 모두 분질러버리고 싶다고 고백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듣지 않을 수 있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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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상대방의 근원이 되는 눈동자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 턱 아래를 보고서 인사하는 버릇이 여태까지 계속돼 이 여자의 첫인상 역시 하관에서부터 시작됐다. 유난히 턱이 짧은 여자였다. 첫 만남부터 저 작은 머리통을 부여잡고 여기저기 입을 맞추면 반드시 행복해질 거라고 장담에 장담을 하고 들였으니 그 기대감에 얼마나 허덕였을지 되짚은 이 순간. 그제야 이해하고 아 아 글을 쓰자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줘 써내린다.
유난히 다정하던 여자였다. 다정에 몸달은 사람이라는 건 또 어떻게 알아서. 그 해 겨울 들어서 가장 추웠던 날, 축축한 아스팔트 바닥을 세 시간이나 함께 걸으며 하얗게 피는 입김 고 사이로 끊임없이 서로를 탐했다. 닿는 입김에 마치 키스라도 하는 것 마냥 속이 울렁거려 대답을 해야 할 박자를 계속해서 놓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확인사살을 하듯 다시 반복해 물어보는 탓에 그저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 속에서 마주 잡은 뜨뜻미지근한 온기에 입술을 꼭 다물고 푼수 같은 웃음을 지우려 무던히 애를 썼던 지난날이다. 나는 이 여자의 닿는 온기를 탐미했으니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무지에서부터 시작된 감정의 울렁임을 점차 어떻게 키울 것인가.
서로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좋아하는 음식(이것조차 아주 추상적이었다.), 자주 사용하는 색, 손톱을 며칠에 한 번 다듬는지, 쉬는 날엔 뭘 하면서 보내는지. 대체 무엇을 보고 좋아한다고 떨림을 담아 고백해야 했던가 그 의문에서부터 반증 찾기를 시작했다. 끊임없이 애정표현을 하면서도 그 대화 속에 여자를 사랑하고자 하는 이유를 찾기에 급급했으니 표현하는 대신 여자의 모든 말에 의미 부여를 하곤 했는데, 그 의미에 부합되는 행동을 관망하며 실망하기를 되풀이했다. 이 무식한 행동에 이어서 완벽함을 찾으려 그녀가 없는 곳에서 그녀를 파헤치곤 했는데, 처음에 닿은 온기는 무지에서부터 비롯된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그 온기를 탐하고자 원했고 돌아오는 허상에 질색을 하곤 했다. 그 무렵, 여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필수불가결적으로 두 눈에 물꼬가 트였는데 끝에 가서는 사람 가득 찬 버스에서 엉엉 울며 좁은 머리통 속으로 우는 이유를 끊임없이 찾으려 애썼다.
끝없는 의문에 거듭 관망하는 태도로 일관하던 내 옆에 여자는 무던히 오래도 있어줬다.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때 즈음 여자는 맞는 말만 골라서 하며 내 속을 태우고, 태우고, 태웠으니 처음과 마찬가지로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유일무이한 온기가 독립을 선언했을 때 쫓던 온전함의 불온전함을 한탄하며 배신을 야기했는데 대놓고 할 자신은 없어 그녀임에 그녀가 아닌 사람을 저주하며 부득 부득 이를 갈았다.
그나마 올곧은 시선으로 여자를 보고자 했을 때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 수박주스 대신 딸기 주스가 나올 때였다. 그 무렵 나는 또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자 했는데 시작 전부터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눠서일까 그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유대감을 감정이라고 이야기하며 함께 나눈 영혼의 이야기들을 전부로 삼아 연소했다. 그렇게 공통점을 태워 서로를 탐할 때 나는 유난히 다정하던 그 여자를 동시에 떠올렸다. 여자는 지독한 비관주의자 임이 분명했으나 항상 입으로는 낙관을 말하며 세상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타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관대했으며, 타인의 선함을 절대시하고 자신의 부정을 덮는 사람이었다. 나는 유난히 다정했던 여자에 대해 돌고 돌아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의 내렸으며 동시에 대체 내가 사랑하고자 했던 여자는 누구였는지 치미는 의구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랑할 수 있었음에도 그 감정을 꾸역 꾸역 집어삼킨 것인지, 처음부터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는지.
내가 너를 떠나는 게 아니라, 나도 너를 떠나는 거야.
하관뿐이 기억이 나지 않는 유난히 다정했던 여자의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조금이나마 풀이하고 나자 나는 두려움에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스스로 만든 허상을 무던히 사랑하려 애를 썼으니 이 얼마나 덧없는 행위였던가. 머지않아 영혼을 나눴다고 이야기했던 사람 옆에는 또 다른 영혼의 동반자가 나타났고, 자연스레 우리의 영혼은 퇴색되어 추억이란 이름으로 곱게 덮였다. 이 작은 머리통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반복, 우둔하고 어리석은 백치는 흔적이 그득 남은 것들을 애써 지우려 안간힘을 쓰며 아,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라요. 정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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