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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call me anything
허민, 끝나지 않은



겨울이,



흘러가는 기차의 차창에 입술을 대고 투명한 휘파람 소리를 내는 밤이다

그 소리를 좁은 대합실 너머로 오래 앉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낫지 않았다, 어젯밤 너무 빠른 기차가 나를 스쳐가 홀로 역 플랫폼에 남겨졌다는 외로운 상처가



그때,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거대한 금관악기처럼

겨울의 기나긴 뒷모습은 고독하고 아름다운 바람의 숨결 소리로 덜커덩 덜커덩거렸지



여러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어, 언제나 함께 간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침대칸에서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따라

차창 밖 별빛들이 입김 같은 하얀 신음을 검은 오선지에 토해낸다는 착각만큼 매력적인 생이 또 있을까



그런 생에서 떨어져 나와

불협(不協)의 한 음처럼 나는 오래 외로웠으므로



도저히 탈 수 없는 기차를 대신하여 텅 빈 대합실 나무의자에 앉아 두꺼운 수첩 위 버려진 연필처럼

기나긴 철로의 악보를 홀로 그리네



멀어지는

너의 긴 머리카락,

깊어지는 시, 기차의 문장

혹은 그것을 끝없이 부정하는 지우개 가루처럼 흩날리는 흰 눈을 한참 동안 맞으며



- 당신에게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당신이 아닌 것을 그대에게 바라는 내게



실망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열차에서 나를 떠민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숨겨진 화물칸의 어떤

이탈 음처럼 -



이라는,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을

네게 남긴다


 


 


허민, 끝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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